평생교육

문화행복

미래·경제

복지·환경

국제

시민·사회

생활건강

영상뉴스

사진뉴스

특별취재

SNN칼럼

오피니언

오늘의 건강

여행 & 맛

포토에세이

생활 한자

지구촌산책

한국의 기차역

인물과 역사

디카교실

자연과 야생화

시사 상식

실버넷 만평

복지관소식

전국의 아름다운 길

은퇴 후 자산관리

외국어

기타

확대 l 축소

인내와 포용, 노년이 행복하다

- 캔맥주가 내게 준 값진 선물 -

“그 캔맥주, 내일 아침 나가실 때 우리 집에 도로 갔다 두세요.” 엊저녁 내뱉듯 던진 딸의 이 한마디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수필을 공부하려고 가는 날은 늘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오늘따라 발길이 무겁다. 마음도 착잡하다. 아니 허탈하기까지 하다. 손에 쥔 캔맥주의 사연 때문일까? 엉겁결에 흰 비닐 봉지에 싼 것이 마음에 걸린다. 비좁은 엘리베이터, 사람의 눈길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침에 술을 들었으니.

도보로 5분 거리인 딸이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9층에 있다. 이 시간 혹시 사위가 있으면 어쩌지?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다행이다. 인기척이 없다. 캔맥주를 냉장고 원래 있던 자리에 넣었다. 자격지심일까? 훔친 물건 주인 몰래 도로 갔다 두는 심정이다. 사람의 눈길을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어제저녁, 청계천은 완연한 봄이었다.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언제 집에 들어오세요?” “아빤 지금 청계천인데.” 올 때 자기 집에 들러 냉장고에 있는 과일이랑 채소랑 챙겨오라는 것이다. 빨리 먹어치워야 한다고 했다. “응 그럴게.” 우리 집에 와 있다고 했다.

손녀가 둘인데, 큰 손녀는 유치원에 다닌다. 아직 1년 남짓한 작은 손녀는 우리 집에서 키운다. 딸이 한의원을 개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손녀는 가끔은 사위와 함께 사돈집에서 자곤 한다. 오늘 사위와 큰 손녀가 사돈집에 갔으니. 그래서 딸은 우리 집에서 자고 출근한다고 했다.

청계천에서 곧바로 딸네 집으로 갔다. 냉장고에 있는 과일과 채소를 챙기는데, 구석진 곳에 캔맥주가 있다. 하나뿐이다. 갈증이 났지만, 집에 가서 마셔야지 하며 함께 담았다. 늘 집에는 캔맥주가 있지만, 아마도 오늘은 없을 것 같았다. 마침 식탁 위에 있던 바나나도 넣었다.

집에 도착했다. 바나나와 캔맥주도 가져왔다고 했다. 순간 딸자식의 반응이 심상찮다. “아빠, 그걸 왜 가져 왔어요?” 캔맥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저 하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목이 말라 마시고 싶어서.” “아빠, 제가 캔맥주 사 왔어요라고 했다.

아내도 덩달아 야단이다. 그걸 왜 가져왔느냐는 투다. “꼼꼼한 사위 성격을 잘 알면서라며 핀잔이다. 그런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쯤 되니 낭패다. 그저 목말라 마시고 싶었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가져 왔는데, 견물생심이었을까. 그렇다고 이 밤에 도로 갖다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시고 싶으시면 제가 사 온 맥주 드세요.” 이 맥주나 그 맥주나 같은 맥주인데 당혹스러웠지만. “그래 알았다.” 그때다. 딸자식은 쏘아붙이듯 한마디 덧붙인다. “아빠, 내일 아침 나가실 때 우리 집에 도로 갖다 두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섭섭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차라리 마시고 올걸. 괜히 가져 왔나 보다. 마음을 추스르며 사위에게 맥줏값을 송금하면 되지 않을까?” 농담 한마디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썰렁하기만 했다. 분위기는 내 편이 아니었다.

서운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서글퍼지기도 했다. 초라하기까지 했다. 내일 아침 도로 갔다 두라는 딸의 말이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묘안이 없다. 내가 저지른 일인데. 캔맥주가 내게 준 선물이려나. “이런 것도 삶이구나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언젠가 사위 집에서 한참을 손녀의 재롱에 푹 빠졌었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인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사위에게 우산 하나 챙기라고 했다. 우산을 건네며 사위는 아버님 꼭 돌려주세요라고 했다.

그래하고 대답했지만, 다음날 우산을 돌려주는 것을 깜박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사위는 왜 우산을 가져오지 않느냐고 딸 편으로 전갈이 왔다. 우산 하나라도 꼭꼭 챙기는 사위다. 자기 물건 소중히 아끼는 알뜰형이라고 할까.

수원행 지하철을 탔다. 경로석이 비었다. 책을 펼쳤지만, 멍하다. 어제와 오늘이 스쳐 지나간다. “맥줏값을 송금하면 되지 않을까?” 했던 엊저녁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서운한 감정을 접고 모든 걸 털어버리자. 귀여운 손녀를 보게 해 준 자식들인데.

자식들에게 너무 기대하지 마라. 부모를 만족하게 해주는 자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 기대가 클수록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자식에게 받은 상처나 배신감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 법. 자식들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마라, 그래야 노년이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어느 수필가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렇다. 자기 것 챙기는 것 나무랄 수만은 없다. 어쩌면 옳은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자식들도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따로 있다. 자식이라고 무턱대고 나의 틀 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비우고 이해하자. 그렇게 노력하자. 마음이 가볍다.

나는 캔맥주를 좋아한다. 갈증에는 최고다. 한데, 그 캔맥주가 시원함을 넘어 아집에만 갇혀있던 허욕을 내려놓게 했다.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깨우침의 스승처럼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했다. 자식을 이해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아니, 최소한 그런 노력을 하게 했으니까 더욱 그렇다.

고요한 밤, 한강 저편 빌딩의 불빛이 아름답다. 예쁜 손녀의 재롱이 아른거린다. 서운했던 감정을 털어버리니 이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다. 제자리로 간 캔맥주처럼 내 마음도 본심을 찾은 것 같다. 캔맥주가 내게 준 선물, 인내와 포용의 참뜻을 되새긴다. 그래야 노년이 행복하다는 것을…. 


실버넷뉴스 류충복 기자
choboryu@silvernetnews.com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