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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카페 바자회

- 김웅렬 신부의 카페 이야기 -

바자회에서 물품들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이 인사하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느티나무 신부로 널리 알려진 김웅렬 신부의 신임 지가 결정되었다. 배티에서 7년 동안 궂은일을 맡아 해오던 신부는 이제 본당을 맡아 일반 사목으로 돌아간다.
 
특강을 다니면서 강의비와 순례자들의 봉헌금을 모으고 카페 회원들의 3만천사 (한 달에 1만 원씩 후원회비를 내는) 규정을 제정하는 등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그런 덕분에 쌓인 빚을 모두 갚고 이제 업무추진비 정도는 비축 되었다고 한다.

12일 충북 진천에 위치한 배티성지에서 이색적인 바자회가 열렸다. 2010년 가을 처음에 배티에 왔을 때 십자가 기도길이 풀로 뒤덮혀 무성했다. 정리되지 않은 무명순교 14인 묘와 6인 묘 길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안내표지판도 곳곳에 설치했다. 둘레길도 멋있게 현대적으로 단장해 놓고 잔디도 심고 트랙터로 직접 깎으며 많은 일을 해 오던 김 신부는 오는 21일 새로운 임지로 떠난단다.

한국 천주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신앙 선조들은 그 누구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산간 지대로 들어가 몸을 숨긴 채 살아가야만 했었다. 바로 그 시절 이곳 '배티' 골짜기와 산 너머 이곳저곳에는 비밀 교우 촌이 형성되기 시작했었다.

주인공인 김웅렬(오른쪽) 신부가 찾아온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다.

충청북도에서는 지난 3월 4일 "진천 배티 성지"를 '도(道) 기념물 제15호' 로 지정 했다. 그 결과 이번에 배티 순교성지 내의 3개소가 동시에 도(道) 문화재로 지정되는 아주 뜻깊은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두가 김 신부의 발에 땀이 나도록 노력한 덕이라고 칭송했다.

도(道) 기념물로 제정되는 바람에 도(道)에서 지원금이 나오고 군청에서도 협찬해 주어 성지개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느티나무 카페 회원들이 물심양면으로 협조가 큰 도움이 되었다. 모든 자금조달이나 지출 내용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카페에 공지하여 회원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2011년 4월 15일에 기념성당 기공식을 했다. 2014년 5월 5일에 최양업 신부 박물관을 준공했다. 지금은 다른 성지에서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기공식이나 준공식에도 카페 회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봉사를 자청했다.

김 신부를 따르는 2만 7천여 명의 카페 회원들은 다시 카페 모임지를 옮겨야 하는 일로 어수선하기만 하다. 바자회 물건은 그동안 카페회원들에게 받은 선물, 김 신부가 읽은 책, 발간한 책, CD 카세트, 서품 기념일이나 영명축일에 선물로 받은 양초, 옷을 포함하여 600여 점이 넘는다.

김만봉(왼쪽) 씨와 안양 내과의사인 서희석(오른쪽) 씨가 김 신부의 이사짐을 정리해 주려고 찾아와 손가락으로 V를 만들며 웃고 있다.

성서 말씀에 옷 두 벌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지팡이 하나만 갖고 다니라는 말씀을 조금이라도 따르려고 임지를 떠날 때마다 바자회를 통해 소지품들을 정리하곤 했었다. 이제 여기서도 가지고 갈 것만을 남기고 모두 바자회에 내놓았다. 신부를 아는 카페회원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신부의 소지품들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아우성이었다.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낫는다는 성서 말씀처럼 신부가 입던 옷을 남편이 입었으면 하고 바라는 여인네도 많다. 신부의 소지품을 간직하는 것이 염원인 신자들만 해도 한 둘이 아니다. 바자회에서 나온 수익금은 모두 불우이웃에 쓰일 것이라고 한다.

김 신부의 어머니 오효숙(87) 여사는 "아들의 팔자소관이지 뭐, 머물다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인데 항상 떠날 땐 섭섭한 마음이 들어요. 더군다나 신임지에 가서 또 적응해야 하니 걱정이 돼요.

사제들이 가는 길이니까 생각하면서도 이만큼 개발하고 떠나니까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가는 곳마다 후진데 가서 빚 값고 건설하고 쓸만하게 만들어 놓고 자본 금도 몇억 원 만들어 놓고 떠나니까 마음은 흐뭇해요.”

“처음엔 신부 된다고 할 때 팔자소관이라고 집에서 떠나면 인연이 끊어지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인이니까 하는 조심스러운 심정으로 항상 대한답니다”고 말했다.

오효숙(왼쪽) 여사와 조숙주(오른쪽) 씨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효숙 여사의 집 옆 (구월동)에 사는 조숙주 (57·여) 씨는 “처음에 오셨을 때는 어르신이 걱정이 많으셨어요. 산속에 신자도 하나 없는 데 가서 어쩌려고 하냐고 하셨대요. 아무것도 없고 풀만 우거진 산속에 어머니 집에서 십자가도 가져가고 성모상도 가져가고 나중엔 돈도 달라고 하셨답니다.

어머니가 돈 두었다가 뭐 하시겠느냐고요. 주님을 위해 쓰고 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요.” 카페 회원도 아닌데 어떻게 김 신부를 알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처음엔 단풍 구경을 그곳으로 갔는데 신부님의 강론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르신이 신부가 좋으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어르신과 함께 온 자매님이 이분이 신부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더군요. 절대로 먼저 내 아들이 신부라고 말씀을 안 하시는 분이세요” 라면서 여사의 인품을 칭송했다.

약 1시간 15분 만에 그 많은 물품이 바닥이 나고 옷 몇 점만 남았다. 그래도 김 신부는 느긋한 마음인듯 하다. 이제는 그 무겁던 짐을 내려놓은 듯이 편안한 표정으로 사제관 마당을 거닐고 있다.


실버넷뉴스 정길순 기자 wrt032@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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