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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복솔 밑에서 본 국군 유골(2)

- 한 많은 6·25헌신자에 못다 한 아쉬움 -

1967년 가을, 나는 군부대의 소대장으로서 밤이면 잠복근무를 하고 낮이면 잠을 재우고 일부 병사는 도로 보수공사 및 겨울 준비 땔감 나무 등을 준비했다. 겨울 준비로 미역, 멸치, 된장 등 마른 부식 등이 보급되었다.

겨울 준비하면 잊을 수 없는 것이 숙소 앞에 세워져 있던 환기용 밧줄이 매여 있던 긴 장대였다. 눈이 많이 내려 지붕까지 차게 되면 숨 막힘을 막기 위한 비상용 기구였다.

밤낮으로 임무 수행에 우리들은 바빴지만, 환상적인 갈대와 억새밭의 향연은 계속되었다. 언제나처럼 갈대밭을 지나온 바람 소리는 개울을 지나며 항상 물소리를 데리고 왔고 가끔 바람이 불어오는 저 건너 숲속에는 뭐가 있을까 하고 궁금증이 나기도 했.

그래서 어느 날 궁금증도 풀고 군부대의 당연한 임무인 순찰 활동을 위해 나는 1개 분대를 데리고 순찰을 나섰다. 갈대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들은 활엽수 골짜기로 들어갔고,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다래다! 하고 소리를 쳤고 우리는 다래 넝쿨이 기어 돌아간 밤나무 아래로 갔다.

큰 밤나무를 타고 오른 다래나무에 많은 다래가 열려 있다. 우리는 모처럼의 산중 진미를 즐겼고 숙소에 있는 동료들이 생각난다고 별도로 챙기기도 했다. 다래가 있으면 으레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머루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살피는데 한 병사가 "소대장님!" 하고 나를 불렀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한 키 정도의 다복솔 밑에 철모를 쓴 채 백골이 되어 누워 있는 국군 유골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놀라운 광경에 한동안 말을 못 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철모를 쓰고 탄띠를 두르고 군화를 신었는데 철모는 녹슬어 구멍이 나고 탄띠는 형체만 있다. 세월에 삭은 군화 속에는 정강이뼈와 발가락뼈가 나란히 담겨 있다. 물론 위쪽으로는 엉치뼈와 갈비뼈도 보였다.

혹시 인식표가 있나 찬찬히 찾아보았으나 없다. 6·25동란이 발발한 지 16년, 그리고 휴전한 지 13년이 지나도록 이 외진 산비탈 나무 아래에서 죽어서도 풍찬노숙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을 보니 한없이 죄스럽고 미안함에 가슴이 저렸다.

이제나저제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부모가 있고, 혹시 결혼했다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있을 텐데 이 외진 곳에서 비바람과 혹한, 그리고 혹서 속에서 온갖 벌레와 짐승에게 뜯기며 그 긴 세월을 홀로 보낸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우선 일렬로 서서 받들어총으로 예를 표하고 '어떻게 할까?'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양지바른 곳에 고이 모시기로 하고 우선 갈대꽃과 들국화꽃을 모아 녹슨 철모 안에 깔고 유골을 정성스레 담았다. 다 담고 나니 철모에 가득했다.

다시 그 위를 갈대꽃과 들국화꽃으로 덮고 마침 석양이 비스듬히 비치는 언덕 위에 대검을 이용해 구덩이를 팠다. 60~70cm 정도를 파고 갈대꽃 억새꽃 들국화꽃 등을 깔고 철모를 넣고 다시 갈대꽃 등으로 덮은 다음 흙을 씌우고 구둣발로 다졌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들국화꽃을 놓고 일렬로 서서 받들어총으로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고이 편히 쉬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뿌듯했다. 어느 정도 후배의 도리를 한 것 같아서랄까?

그 후 AP장에서 CP장으로, 그리고 다시 GP장으로 옮기면서 수 없는 적의 도발과 이에 대한 응전과 대비로 바쁜 날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계급도 소위에서 중위로, 그리고 대위로 승진하고 그에 따라 직책도 소대장에서 부중대장으로, 그리고 대대 참모에서 중대장으로 바뀌는 바쁜 생활로 다복솔 밑의 국군 유골 일은 잊고 있었다.

1970년 6월 30일 전역을 하고 중학교 교사가 되고 결혼을 하고 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6·25 전사자 유해 찾기 뉴스가 들리면서부터 나는 다복솔 밑의 국군 유골 일을 떠올렸고 다시 찾아 부모를 찾아 주거나 국립묘지에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동안 살아오면서 비교적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되거나 운명의 실타래가 잘 풀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낄 때마다 이게 그분의 음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0년대까자는 유해를 찾는다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장 등의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문직이 되어 교육청에서 일하면서부터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다 1993년 사할린교육원장으로 나갔다가 1997년 돌아와 1999년 교감, 2002년 교장에 임명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유해 찾기에 관심이 높아져 뉴스에 종종 보도되자 2004년, 더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국방부 담당 부서에 연락했다.

그 후 12사단에서 연락이 와 날짜를 정하고 찾아가기로 했다. 방학이 되자마자 원통으로 가 사단사령부로 가니 담당 장교가 안내했다. 오후에 도착했기에 전방 들어가기 전 마지막 마을인 천도리로 가서 1박을 하기로 했다.

1966년도부터 제대한 1970년까지 생활의 한 무대가 되었던 곳, 이런저런 애환이 깃든 곳이기에 더욱더 반가웠다. 그 당시 게딱지 같았던 허름한 집들이 사회 발전을 따라 번듯한 집들로 변해 있었다.

식사 후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인제천 상류인 서화천변으로 가니 정리되고 반듯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둑길이 있고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1966년 12월 어느 날 면회 온 지금의 집사람과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걷던 생각과 얼굴에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나누던 입맞춤의 달콤한 추억도 새록새록 새로웠다.

세월은 갔어도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추억은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묻어나는 그 많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안내 장교와 기억 속의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 옛날 민통선이었던 연대 앞 검문소 자리를 지나고 칠성 고개를 넘어서니 남방한계선전 마지막 마을인 서화리가 보였다. 거기도 오가며 이런저런 사연이 깃든 곳이고 특히 밀주가 참 맛있었는데···. 부중대장으로 근무했던 수색 중대를 우측으로 힐끗힐끗 보면서 모래톱을 돌아 그 정들었던 AP 자리로 가니 초소는 간데없고 잡초 잡목만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세월이 40여 년이 흘렀으니···.

철모를 베고 누우면 파란 하늘이 그림같이 보였던 작은 잡목의 뒷동산은 길길이 자란 나무들로 숲이 되었고 밤이면 자장가 삼아 조잘조잘 때로는 쏴쏴 하고 물소리를 들려주던 큰 개울만이 그대로였다.

개울 건너 그 환상적인 은빛 갈대꽃, 억새꽃밭은 어디로 가고 역시 높게 자란 나무숲이 저 멀리까지 이어져 끝이 안 보였다. 찾기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추억의 징검다리 건널목을 지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옆 지뢰표시가 있는 길을 따라 한참을 가도 항상 머릿속에 남아있던 유골 묻은 곳이 안 보였다.

기억 속의 갈대 벌판과 그 너머 이어지던 작은 골짜기와 양지바른 언덕과 구릉은 우거진 숲으로 한통속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50여 년 세월이 벌판과 언덕을 바꾸어 놓은 것도 아닌데 무성하게 자란 숲이 분간을 못 하게 했다. 같이 간 안내 장교도 당시 좌표라도 남겨 놓았으면 몰라도 기억만 가지고는 더구나 숲이 우거진 여름철에는 찾기 힘들 거라는 말을 하면서 낙엽 진 겨울철에 한 번 와볼 것을 권했다.

그때는 나라 형편이 어렵다 보니 6·25 전사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나 전사자의 유해 찾기 같은 것에는 관심이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나라 형편이 나아져 과거 소홀히 했던 조국을 위한 헌신자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었고, 나도 항상 언젠가는 그분의 가족을 찾아서 생사를 몰라서 한을 품고 사는 가족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또 이름 모를 산하에서 한 많은 죽음으로 구천을 헤매고 있을 그분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주는 것이 이만큼 성장한 이 나라가 그분에게 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항상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쉽게 찾아 DNA 검사를 통해 가족도 찾아주고 국립묘지 안장까지 생각했던 꿈을 접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또 언제인가는 다시 오리라는 꿈을 안고서···.


한만희(전 사할린교육원장, 서울시 중학교 교장) bee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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