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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만에 생긴 일 두 가지

- 그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의 경험 -

내가 대학 2학년이 되던 1959년 봄에 친구와 우이동 버스를 탔다. 드럼통을 펴서 만든 버스라 높이가 낮았다. 180cm인 나는 그 당시 버스를 타면 제일 먼저 습관적으로 어느 곳에 공기통이 있는가를 살폈다. 높이가 낮아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라 그 공기통으로 들어가야 겨우 머리를 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장이 제대로 안 된 변두리 길을 달리면 위아래로 덜컹거리고 좌우로 흔들리는 횟수가 일정치 않아 중심 잡기가 여의치 않았다. 손잡이를 꽉 잡은 팔에 잔뜩 힘을 주어 몸의 균형을 잡지만 ‘따닥’하고 공기통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날도 몇 번의 부딪침으로 머리가 얼얼한 상태로 우이동 종점에 내렸다. 그곳에서 백운대 입구까지가 아스라이 보였다.
 
젊은 혈기로 부지런히 걸어 산 입구에 다다랐다. 한참을 가서야 숨이 턱에 와 닿는 깔딱 고개를 만났다. 계단이나 손잡이 같은 보조 시설이 안 되었던 때라 돌 틈 사이로 오른다는 것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세 시간이 족히 걸려 넓적한 백운대 바위까지 올랐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오르니. 저 멀리 6·25전쟁 때 망가진 폐허에서 힘차게 일어서는 서울이 보였다. 서울 근교에서 가장 높은 836m의 봉우리를 정복했다는 만족감을 안고 등산 같은 여가생활을 멀리한 채 50년 세월을 보냈다.

나는 2009년이 백운대 등반 반세기가 되는 해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0월 26일 서울 삼락회 멤버 여섯 명과 함께 다시 올랐다. 50년 전과 다르게 수유역에서 택시를 타고 도선사까지 한 시간 이상 걸어야 할 곳을 단숨에 왔다.

여기서부터는 산을 오르는 코스이다. 하룻재와 산악구조대가 있는 곳을 지나면 가파른 언덕이 나온다. 예전과 달리 손잡이 줄과 계단이 잘되어 있어 훨씬 오르기가 수월했다. 물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안전시설물 설치로 일부 훼손한 것은 아쉽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므로 그 정도 상처는 감수해야 한다고 본다.

백운산장에 오니까 갑자기 하늘이 시끄럽다. 헬리콥터가 산 능선에서 내려온다. 땅을 밀어내는 불도저가 그 높은 산 속에 있기에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하고 우리끼리 논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이 개울가 돌무더기 옆을 고르게 다듬기에 “무엇 하는 것일까? ”하며 자기주장이 옳다고 떠들던 우리는 헬리콥터가 달고 온 기차 칸같이 생긴 육중한 철 박스를 조심스럽게 몇 번을 위아래로 당기고 늦추고 하더니 그곳에 내려놓는 것을 보고서야 논쟁을 멈추었다.

여러 사람의 인부가 손짓하며 옆으로, 아래로 방향을 표시하며 제 자리를 잡아주었다. 갑자기 그곳에 번듯한 화장실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이제껏 사용하던 화장실은 헬리콥터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갔다. 산속에 있던 낡은 화장실은 실어 가고 새 화장실이 멋지게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했다.

기계문명의 이기(利器)가 우리의 생활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바꾸어 놓을 수 있다니!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뿌듯함을 가슴에 안고 산마루에 있는 ‘위문’을 지나 백운대를 올랐다. 일부 조심스러운 곳도 있지만, 계단과 쇠줄이 잘 만들어져 쉽게 오를 수 있었다.

50년 전에도 질펀히 앉아 쉬던 바로 그 넓은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그 하늘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 감회롭다.  외국의 젊은이들이 있기에 “너희 나라에 이렇게 좋은 등산코스가 있느냐?”고 물으니 “북한산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우리에게 선물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또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이렇게 큰 변화를 거쳐 우뚝 선 우리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개선장군 같은 기분으로 내려오다가 쉼터가 있기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등산객을 피하여 조금 떨어진 소나무 쪽으로 향했다. 땅 위로 뻗어 나온 굵은 뿌리에 발이 걸려 아차 하는 순간에 머리를 땅바닥에 거꾸로 박았다. 머리가 땅바닥에 부딪히는 딱 소리만 들은 채 바닥에 넘어져 한 바퀴를 돌았다.

바로 옆에 낭떠러지가 있었으니 살아 있는 것만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조금 후 정신 차려 보니 얼굴과 손에 작은 상처만 있고 크게 다친 곳은 없다. 동료 몇 사람이 천만다행이라며 만져주고 털어주면서 다친 곳은 없느냐고 위로해준다. 이렇게 의식 없이 몸이 자유낙하 상태로 넘어진 것이 두 번째다.

정년퇴임 직후에는 저녁때 서울 복판에서 회의 다녀오다가 넘어져 이마에 스물다섯 바늘이나 꿰매는 시련을 겪었지만 두 번 모두 불행 중 다행인 것이 고맙다. 항상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이런 일을 당한다. 나이 들면서 첫 반째 조심해야 할 일이 넘어지지 않는 것이란다. 하산하여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 마시는 것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50년대 말 대학을 다닐 때 가장 큰 숙제는 등록금과 저녁에 쉴 보금자리였다. 두 가지를 해결하는 지름길은 입주 가정교사였다. 다행히 1959년 을지로 2가 현재 중소기업은행  옆 골목 이층집에서 초등학교 학생 두 명을 가르치게 되었다. 나로서는 커다란 짐을 해결한 것이었다.

하지만 숙식을 받으면서 함께 살다 보니까 시간과 행동에 많은 제약과 규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과 미팅이나 친구들끼리 모임이 있을 때 대학생으로서의 자유와 낭만을 향유하면서 지내지 못한 아쉬움은 크게 남는다. 요즈음 학생들을 보면서 “지금 대학 생활을 다시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옆집에서 공부하러 오는 녀석은 곱상한 얼굴에 항상 생글생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때로는 권총을 빼는 시늉을 해가며 놀기 좋아하는 그 녀석으로부터 나는 ‘OK 목장의 결투’이니 ‘셰인’이니 하는 서부 영화 이야기를 종종 접하였다.

버트랑카스터, 아란랏트, 죤웨인, 케리쿠터 같은 총잡이들의 스릴 있는 이야기도 그 녀석에게서 들었다. 내가 공부 가르쳐주는 대신 그에게서는 영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말하자면 학습지도 면에서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그 녀석과는 많은 대화를 하였다.

눈 밑에 졸음기가 스며들다가도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트럼펫을 부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이야기를 살짝 할라치면 눈이 번쩍하면서 영화 줄거리를 줄줄 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나팔이 불고 싶어 밴드 반을 노크했더니 드럼을 주면서 두드리라 했단다. 그리하여 며칠을 학교에 나가지 않았더니 요구사항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트럼펫을 불고 싶다고 했더니 허락을 하더란다.

그 후 우리는 서로를 잊은 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지난 2009년 12월 15일 50년 만에 귀에 익은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와서 반갑게 두 녀석을 만났다. 그중 한 녀석이 가수 조경수다.

어릴 때부터 영화, 음악 쪽에 관심이 많더니 역시 소질은 그쪽에 있었나보다. ‘행복이란’, ‘아니야’, ‘YMCA’ 같은 노래를 부른 그의 고운 목소리는 이제 그의 아들 뮤지컬 배우 조승우에게로 DNA가 이어졌는가 보다. 환갑이 넘은 초등학생 두 녀석과 함께 그 시절을 넘나드는 재미도 한 번에 채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함을 느꼈다.


정완호 박사(수필가, 전 한국교원대학교 총장) wanho-ch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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