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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의 삶을 돌아보며

-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애국 활동을 살펴보다 -

겨울이 들어선다는 입동인 7일 오후 2시 30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몽양 여운형 기념관을 찾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큰 스승이자 양심적인 몽양 여운형 선생의 삶을 살펴보았다.

기념관 중앙에 몽양 선생님의 동상과 그의 업적이 전시되어 있다.

경의·중앙선 신원역에서 500여 m의 거리에 몽양 기념관이 있었으며 찾아가는 길목에는 몽양 선생의 삶을 알 수 있는 그림이 벽마다 그려져 있고 곱게 단풍이든 길에는 무궁화가 심겨 있었다. 또한, 몽양 유객문의 시작으로 16개의 몽양 선생님의 어록이 새겨진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어 읽으며 오르니 몽양 선생의 삶과 사상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었다.

묘골애오와 공원에는 중앙에 태극기 문양이 있고 둘레 벽에는 몽양 선생의 활약상을 부조 작품과 설명이 되어있었다. 묘골은 동네 이름이고 애오와는 몽양 선생이 즐겨 썼던 나의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이었다.

몽양 선생 고향에 세워진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자유와 독립의 혁명가로 몽양 선생의 3.1운동을 기획한 선구적 실천가, 일제를 제압한 정의의 웅변가, 세계의 혁명가들과 교류한 조선의 거인, 건국을 준비했던 선견지명의 전략가, 통일 정부의 첫 원수가 되었을 양심적 지도자 등으로 구분하여 몽양 선생의 활약상이 게시되었다

몽양 선생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탄생하셨으며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셨고 기독교에 입교, 생가에 기독 사립 관동학교를 설립, 국채보상 금연운동에 힘썼으며 부친의 3년 상을 마친 후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하고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 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강화조약 회의에 파견시켰고 상하이 대한민국 입시 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 제국 호텔에서 독립을 연설하셨다.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가출옥 석방, 1933년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셨으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이 되었고 유언비어 유포 협의로 투옥되셨다.

관람객들이 몽양 선생님 생가를 찾아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145개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좌우합작 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섯 차례 이북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합작에 힘썼으나 1947년 7월 19일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62세로 서거하셨다.

기념관 2층에 오르면 잔디밭이 펼쳐지고 생가가 조성되어있었다. 택호는 자손들이 영원히 이름과 명예를 지키라는 선조의 유훈인 영회암(永懷菴)으로 4채로 이루어진 한옥이었으며 몽양 선생 가족이 생활했던 유물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농촌 문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몽양 선생의 뜻을 이어나가기 위해 건강이 필수라는 의미에서 주민지원 사업으로 조선 스포-쓰도장(朝鮮 SPORTS 道場)이 있어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이나 등산객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가운데에는 씨름장이 있었고 둘레에는 몽양 선생과 팔씨름을 할 수 있는 팔 씨름장, 권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펀칭 불 가슴, 철봉, 역도 등 많은 운동 시설이 있었다.

안내자는 “몽양 선생님은 참 애국자이시며 선생님의 서거를 국민들이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오늘의 국민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60만 명이 애통했으며 묘소는 우이동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재중 기자 leejj820@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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