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최경자 / 등록일시 : 2019-06-18 08:54:42 / 조회수 : 39
제목 시련의 땅 강화도/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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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땅 강화도/김영남


조선시대 강화도 남단 해협을 지키든 초지진 입구 언덕에는 크고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늘어진 가지에 버팀목을 받쳐 놓았는데 문화해설사는 특이한 점을찾아보라고 한다, 큰 가지 한쪽에 두뼘은 될만한 곳을 콘크리트 모양세 보강재로 메꾸어놓은 흔적이 보인다. 신미년 미군과 전투 시 포격을 당해 생긴 포탄 자국이다.군함에서 초지진에 함포사격 후 상륙하는 미군과 조선군은 전투가 벌어졌다.
솜을 넣고 여러 겹 누빈 조선군의 면 갑옷은 폭발하는 포탄에 불붙기 좋은 불쏘시개였다.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물살 빠른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자살 행위였다. 참전기를 쓴 한 미군 병사는 진지에 조선군의 시체가 쌓인 광경을 보고 이 전투는 학살이라 표현하고 있다. 열악한 무기에도 상륙하는 미군과 백병전을 벌였지만 조선군 전사 343미군 3명이었다. 조선의 홍이포는 쇠덩이를 쏘는 포환砲丸으로 사거리는 600m 미군함포는 1200m 두배를 넘고 목표물에 떨어지면 폭발하는 포탄砲彈이었다.


명중률 높고 발사속도가 빠른 신형대포에 방벽은 힘없이 파괴되었다
. 신미양요는 145년 전 사건으로 어른과 아이 싸움 같은 전쟁 역사다이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었다. 1866년 대동강으로 무단 침입한 미국 국적 상선 제너랄 셔먼호는 무장한 선박이었다. 처음에는 우호적이었으나 배가 좌초되면서 선원들과 충돌하여 조선인 여러 명이 죽었다.


화공을 당한 제너랄 셔먼호 선원들은 전멸하였다. 이후에도 조선 조정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고 프랑스인 신부들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규명한다는 빌미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는 병인 양요를 겪었다. 이들 나라는 조선에 자국민들이 살해당한 원인 규명과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여 전쟁으로 커진 것이다. 미국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사전 징조를 알았고 나름대로 준비했지만 재래식 무기는 상대가 될 수 없는 전투였다.


미군이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하여 이양선을 물리친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국제 정세는 열강들의 식민지 확보 쟁탈전의 격동기가 된다초지진 전시각의 홍이포는 당시 전투에서 사용된 것이라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물자가 부족하여 사찰의 종 심지어 가정집의 놋그릇까지 징발해갔는데 그때의 진품이 남았다는 것은 행운이다. 일본군 육군 대위 아라이가 자기 집에 소장한 것을 광복 후 장택상 씨가 소장하고 그 아들 장병찬 씨가 기증하였다.


조선의 신미양요 사건 발생
17년 전인 1853년 이웃 일본도 미국의 무력 시위와 통상압력으로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은 대처 방식이 우리와는 달랐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에 분노한 세력은 소외 당하던 번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그들이 주도한 명치유신이 성공하면서 봉건 질서를 해체하고 근대화된 정치 사회 체제로 개혁하여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250년을 집권했던 막부정권의 세력 교체가 이루어 진 것이다.


산업화된 일본은 서양 세력으로부터 식민지정책을 배워 조선과 중국 동남아시아 등
주변 국가를 침략하였다. 18세기말부터 일본은 동아시아에 식민지 확보에 나서면서 주변국들과 충돌하였다.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를 받아내 러시아를 가상 적으로 러일전쟁에 대비한 군비확장에 착수하였다.  신미양요 전사자 기념탑 앞에서 우리 일행은 묵념 후 쌍충비 맞은편 담장에 둘러 쌓인 묘들을 보았다. 신미년 전투에서 불에 타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전사자들을 일곱묘에 합장한 신미 순의총이다. 많은 공력을 들여 가꾸어도 떼가 잘 크지 않고 봉분의 흙이 들어난다는 것이다.


그때 가신 분들의 한이 서려서일까
? 그 원혼을 위로하는 광성대제廣城大祭가 음력 424(금년은 양력 530) 열린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을 당하고도 국제 정세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 조선 말기집권 세력이 나라를 망치게 된 원인은 어디서부터인지 궁금해진다당시 성리학은 백성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학은 개혁자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피폐한 삶을 사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는 취지에서 실용적인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조선후기 문예부흥시대라 할 수 있는 영조와 정조시대 탕평책으로 남인 출신이 등용되었다. 그들 중에는 다산 정약용 정약전 연암 박지원 등 실학에 정통한 이들이 많았.   이들에 의해 상공업 발전과 국운 상승 기회였지만 정조대왕이 승하한다.후계구도가 취약해지면서 어린 임금에게 왕대비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한다. 견제 세력이 없는 외척의 세도 정치는 부패 사회가 되면서 많은 민란이 일어났고 홍경래의 난과 의적이라는 불리던 임꺽정 등이 활동한 시기였다


천주교는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분제도를 부정하여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정권 유지에 방해되는 정적은 천주교 신자라는 명분만으로 재판 없이 처형했다일제의 식민지 확보 책략이었지만 갑오개혁으로 신분 제도 폐지, 초등학교 설립, 금제도 개혁과 신문 발행 등 세상이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의료기술과 과학기술을 가르치면서 학교와 병원 교회가 번창한다. 만약 정조 사후에도 실학자를 중용하고 천주교도가 생업에 전념, 산업이 발전되었다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상상해본다.


한강 입구 우리나라의
4번째 큰 섬 강화도는 고대에서 현재까지 전략적 요충지다.고려는 강화해협을 끼고 몽골과 40년간 항쟁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으며,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과 전투도 있었다. 강화해협에 침입한 일본의 운양함과 포격전을 벌였지만 초지진은 파괴되고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는다감시하기 좋고 탈출하기 어려워 연산군 과 광해군이 유배당한 섬, 시련의 땅은 지금도 남북으로 대치한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지켜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 해설사 조숙자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돌아본 지역은 이 섬의 반절도 못 된다
.초지진 광성보 전등사 등 남쪽 일부만을 둘러본 것이다. 초지대교와 강화대교 연육교가 개통되면서 이제 섬이 아니다고인돌 유적지와 정족산성, 단군의 흔적이 실제로 남아 있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 등은 더 가보아야 할 곳들이다.  나는 하룻밤을 묵으면서 여유로운 역사 기행을 하고 싶다.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늘어나면서 강화도의 쌀 생산량은 주민 자급량의 7배가 넘는다. 군수는 품질 좋은 섬 쌀을 잘 팔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조선왕조 때 미국과 전투를 겪었지만
6.25 한국전쟁 이후 혈맹 사이가 되었다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적국이었던 중국과 수교하였고, 중국과 우리나라 무역 규모는 미국보다도 커졌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 정세다.

 

 

 

 

필자 약력

1944년생

한극전력공사 30년 재직

정보통신 특급기술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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