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최경자 / 등록일시 : 2019-10-29 06:49:46 / 조회수 : 72
제목 귀중한 것 버리기/구양근
첨부파일
내용


귀중한 것 버리기/구양근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생각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니었던 것을 그렇게 집착했구나 하고 허망할 때가 있다. 책의 경우가 그렇다. 사 모을 때는 식사비를 아껴서까지 사 모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갚진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일단 기간이 끝나고 나면 괜스레 짐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 년 전쯤에 큰 맘 먹고 중간 트럭 한 대 분의 책을 모교에 기증했지만 현재 보관하고 있는 책이 또 두 방에 가득하다. 이번에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갈 계획을 세워놓고 보니 이 책도 짐이 된다. 한 방 분량은 또 줄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평생 근무했던 대학 도서관에 전화했더니 흔쾌히 받아주겠다고 한다. 듣는 바로는 책의 기증도 쉽지 않다는 소문이다. 디지털 세상이 되고 보니 종이책은 자칫 애물단지가 되기 쉽고, 보관할 공간도 무한정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숨결이 깃든 책을 내 제자들이 볼 것을 생각하니 흐뭇하기도 하다.

    

두 방의 책의 분별작업을 시작했다. 보낼 책과 남길 책을 분류하고 버릴 책도 분류하였다. 이번에 도서관에 보낼 책은 저번보다 더 귀중본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내가 그처럼 아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25(예문인서관) 50권 전 세트, 세계역사(이와나미) 30권 전 세트 등은 모두 귀중분이다.

    

25는 내가 대만에 유학하던 20대에 야심을 품고 마련한 책이다. 세계역사30대에 일본에 유학하면서 각고 끝에 장만한 것인데, 일본인도 전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매 권이 출판되면서 절판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외 청계외교사료(문해) 9, 이문충공전집(문해) 7, 주판이무시말(籌辦夷務始末)(국풍) 7권도 무두 원본이다. 역시 20대 유학시절에 세계적인 문사철의 대학자가 되겠다고 마련한 어려운 책들이다. 다른 희귀본의 영인본도 많고 단행본들은 더더욱 애착이 가는 것들이다.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손때 묻은 책들을 독한 맘먹고 손에서 떼어 놓기로 한 것이다.

    

버려야 할 책은, 지금까지 내가 저술한 20여 종의 책의 여유 본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따로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책을 출판하면 대학자나 유명세가 붙은 작가가 아니고서는 대개 자기 돈 들여서 출판을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인세를 받고 출판한 것은 학술서적 1권과 논설집 1권뿐이다. 나머지 전부는 무료로 원고를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100권 또는 몇 백 권을 사주는 것이다. 명목은 저자의 기증본으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돈을 내고 가져가는 것이니 내 돈 들여 출판한 것이나 다름없다.

    

책은 기증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몇 백 권이나 되는 책을 누구에게 다 줄 것인가.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낼 수도 없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야의 사람한테 보낼 수도 없으며 보내면 공해로 여기고 귀찮아할 것이 분명한데 보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각 도서관, 연구소까지 다 보내고도 절반도 소비를 못하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원칙을 세웠다. 출판한 지 오래  된 내 책은 두 권씩만 남기고, 출판한 지 5년이 아직 되지 않은 것은 열권씩 남겨두고 모두 버리기로 하였다.

    

버려야 할 품목으로는 또 별쇄본이 있다. 수도 없이 발표한 논문들에는 별쇄본이 최소한 50책씩은 딸려온다. 이 분량도 만만치 않았다. 내 논문을 필요로 한 사람은 상상외로 많지 않다. 불과 서너 책 소비하고 고스란히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별쇄본은 3책씩만 남기고 모두 버리기로 하였다.

    

어제는 마침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이어서 종이 버리는 대형 자루 안에 한 나절이나 손수레로 책을 날랐다. 두 동의 수위아저씨들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한나절을 같은 작업을 반복하자 와서 보고 책을 뒤적여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새 책을 다 버리세요?”

  , 짐 되는 것은 모두 버리기로 했습니다.”

  아니, 이거 선생님이 쓰신 거 아니에요?”

  .”

  저희들이 몇 권씩 가져가도 돼요?”

  .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수위아저씨들이 주섬주섬 몇 권씩 집어 들고 돌아간다. 정기 간행물도 버리기로 하였다. 창간호에서부터 서너 권과 최근호 둬 권, 그리고 중간본은 내 글이 실려 있는 호만 남기고 모두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니면 정기 간행물이 끝없이 쌓이게 되어 있다.

    

, 이제 분류작업이 끝이 났다. 학교도서관에 전화하였다. 분류작업이 끝났으니 언제든지 와서 실어가도 좋다고 하였다. 차량이 준비되는 대로 1주일 내로 연락하고 가겠다는 회답이다.

    

나는 집에 보관할 책을 훑어본다. 스스로 새로운 사실에 놀라 슬며시 미소 짓는다. 어려운 책, 외국어로 된 책들은 거의 기증하고 대부분 한국어 책, 일본어로 역주가 되어 있는 책들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청년시절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얼마 안 됐을 때이다. 근무한 대학의 국문과 허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새로운 광경에 눈이 휘둥글 해졌다.

    

그분 책장의 책이 태반이 한국어로 된 책이 아닌가. 교수 방에 한국어 책이 꽂혀 있다는 것이 여간 생경하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내 책장이 그때 국문과 허 시인의 책장처럼 가볍고 기분 좋은 책장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 홀가분하다.

    


약력

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겸 총장, 주 대만한국대표부 대사 역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대학 사학과 석사졸업. 동경대학 동양사학과 박사졸업. 수필집 : 부단히 떠나야한다』 『이웃나라에 떨지 마라』 『어느 방랑자의 어머니등 소설 : 칼춤. 안개군함(2). 붉은전쟁(3).

단편소설집 모리화

    

최복희 기자 bokhee48@silvernetnews.com


리스트가기 
이전 게시물 :  열무김치 추억/ 김영남
다음 게시물 :  세 사람의 최 씨 처녀/ 황재영